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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처소, 이 공간에는 잡다하고 주의 산만한 제 흔적을
올립니다. 독서일기에서 시작하여, 영화 본 이야기, 음악 들은
얘기, 아이 키우는 해프닝(^^), 별 주제없는 수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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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르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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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9월 5주차, 추분의 왕창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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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주차, 추분의 왕창리
2024년 9월 29일(일)
어제 와서 일박이일 지냈다. 가을 햇볕에 널어놓은 토란대가 금새 말랐다. 이런 볕에는 이불을 내다 말려야 하는데 바지랑대 세워서 빨래줄 만들어달라는데 그걸 안 해주고 자고 있다. 집에 가야하는데 햇살 따가운 가을볕에 일하느라 지쳤다고, 잠깐 눈 붙이고 간다는 한사람의 시에스타가 길어졌다. 난 눈을 붙이는 대신 맥북을 열었다.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떼루아의 맛」(신이현 글, 김연수 그림)과 「제철 행복」(김신지 글, 요리 일러스트) 두 권 중에서 어떤 책부터 읽어야하나 행복한 고민을 했다. 우리학교 도서관 신간도서들이다. 신이현 작가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수안보 근처에서 포도밭 농사를 하고 있다니, 나는 왜 장정일의 와이프로 「숨어 있기 좋은 방」으로만 기억을 했을까. 올해 처음 열린 머루포도 두 그루가 있어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다. 「제철 행복」 표지에는 24절기,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 네 번의 다정한 안부라는 안내글이 있다. 두 권 모두 집에 가서 찬찬히 읽고 몇 자 쓸 책이다. 허겁지겁 지금의 시간부터 찾아봤다.
그래서 지금은? 추분이 막 시작된 시간이다. 맑은 가을 하늘이 풀숲을 헤치고 이 땅 위까지 내려오는 날이다. 아침에는 서늘한 공기에 깜짝 놀랐지만, 낮에는 따가운 가을 햇볕에 새로 심은 모종과 늦게 나는 호박과 여주 등이 알차게 자라는 시절이다. 그래서 자꾸 하늘을 찍게 된다. 김신지 작가의 소개에 의하면 추분은 계수나무 향기가 제철이라니, 달고나 냄새 나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다:) 「제철 행복」 을 읽기 시작했다고, 제목에 ‘추분'을 넣었다.
토요일엔 엄마 생신이라 아침만 해먹고 퇴촌 하나로 들러서 왕창리에 왔다. 원래는 동네 입구에서 점심 사먹으려고 했는데 미역국을 끓여드리고 싶었다. 퇴촌 하나로에서 삼겹살과 한우 국거리, 진도 미역을 샀다. 엄마보다 고작 한 시간 먼저 도착한 것이라 압력솥에 미역국을 끓였는데도 미역이 부드럽게 불지 않았다. 표고목에서 딴 표고와 우리집 대파를 같이 굽고, 묵은지에 싸먹었다. 엄마는 왕창리에 오신 것만 해도 좋으신지 밭에서 나오시지 않아 얼른 식사하시라고 한참을 불렀다.
아침은 만들어놓은 호박죽으로. 밤을 올려서 먹었다. 밤벌레처럼 살이 찌겠다. 가을 햇볕을 따갑게 받으며 배추와 무가 몸을 키우고 떡잎을 냈다. 이은숙 교장쌤이 주신 큰 표고목에서만 표고가 났다. 다른 것들은 영양가가 다 떨어졌을까, 다음 주까지 기다려봐야겠다. 일단 굵은 표고를 땄다. 엄마랑 동생네 가져가라고 집에서 밤을 챙겨왔고, 늙은호박도 하나씩 드리려고 챙겼다.
여주 앞, 사단콤보 밭에서 빼곡하게 올라왔다. 공심채 - 김장무 - 알타리무 - 청갓 작게 네 줄이다. 엄마는 오자마자 밭을 한 바퀴 도시고, 무를 솎아주시고 늘어진 가지를 땄다. 엄마한테 선물한 스웨터가 흰머리와 잘 어울린다. 보드랍다고 좋아하셨다. 난 딱 삼겹살과 미역국만 했다. 묵은지를 챙겨온다고 김치를 가져오지 않아 겉절이라도 할 것을, 할 게 없었다. 고구마순은 지난 주에 철거해서 먹을 것이 없었고 오이도 끝났다. 엄마가 가시고 나니 밭 여기저기에 있는 민들레와 고들빼기 새순이 보였다. 무화과를 하나 드시고는 입술이 깔깔하게 부르트신다고 엄마는 별로 안 드셨다. 다음에도 무화과는 안 사는 것으로
고구마 좀 챙겨 드리고… 엄마랑 동생네는 휙 가셨다. 숙제를 잘 끝낸 느낌. 가을 하늘이 청명했다. 둘이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도 세 시, 책을 보다가 또 잤다.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아 낮잠은 그만 자고 오랜만에 왕창리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히말라야 산에 온 듯 구름만 보이게 셀카도 한 장, 둘이서도 한 장…. 돌다가 보니 취꽃이 흐드러졌다.
윗동네에 사는 이 아이는 밀크, 그냥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우리를 보더니, 한 사람을 보더니, 보리 나물이처럼 다가가 누워 버렸다. 길냥이치고는 파워E인 듯. 한 사람이 예뻐했다.
저녁은 삼겹살 남은 것에 양념 소스를 한 수저 발라 구워 먹었다. 날이 깜깜해졌는데 밭에서 양말이가 오더니 우리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다. 밤하늘도 좋았다.
엄마가 밥에 둬 먹으라고 밤을 다 까오셔서 아침엔 밤밥을 해먹었다. 민들레순 따러 나간 길에 본 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멀리 해가 뜬다. 3사분면은 산 뒤에 이미 해가 떠서 그 빛을 받아 불그스름하다. 일요일 한 사람은 예초기를 돌렸고 난 틀밭 주변이랑 화단의 잡초를 다 뽑았다. 이 코스모스도 충분히 봤으니, 사진 한 장 찍고 늘어져 지저분해서 다 뽑아버렸다. 잡초를 뽑고 나니 밑에서 가을 새순이 돋아나는 것들이 많다.
이게 밭에서 딴 민들레와 고들빼기 새 잎 겉절이. 들기름과 참깨, 연두와 매실청을 듬뿍 넣고 휘리릭 무치면 나도 ‘나물의 민족’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밤밥과 겉절이로 아침상을 차리는데 한 사람이 얼른 배추에 약을 쳤다. 약을 하나도 안 친다는 것은 거짓말, 벌레가 말도 못하게 많아 유기농 성분이라는 약을 좀 줬다. 일주일이 지나면 날라간다지만, 솎아낸 배추와 무우는 먹지 말 것. 늙은호박은 아예 손질해서 가져왔다.
점심은 대파와 표고 듬뿍 라면. 토란대를 널었는데 볕이 좋아 반나절만에 다 말랐다. 한사람은 잔디를 예초기로 깎았고, 난 집에 가져갈 것을 챙기면서 이주 전에 만든 머루포도청을 걸렀다. 매실청이나 포도청이나 비슷하게 설탕 넣을 때 넣을 것이다.
왕창리에서는 아침을 먹고 나서 공들여 커피를 내려 먹는다. 방울방울 아껴 먹었다. 늙은호박이 꽤 되어서 늦게 달리는 호박은 조막만한 것이라도 땄다. 감자칼로 버터처럼 벗겨서 소금에 절였다가, 계란물을 부어 치즈 한 장 끼워서 구우면 꽤 맛있다. 막 나오는데 냥 냐앙 냥 삼색이가 자기 뭐 좀 주고 가란다. 사료접시에 두 그릇 수북하게 부어놓았으니 그거 먹으렴. 우리 동네 제일 가는 미묘다. 집에 와서 두 시간을 서서 재료를 정리했다. 호박 조림하고 더덕민들레 무치고 밤밥 하는 사이, 표고를 말리고, 호박을 절이고, 세탁기도 두 번 돌렸다.
가을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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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나
